** 아름다운 우리江山

인천 차이나 타운

mulyoon 2010. 3. 30. 08:59

 

               

 

  仁川驛에 내려서 자유공원쪽으로 보면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중국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우뚝 솟은 패루를 지나 계속 경사진 길을 3백여 미터를 걸으면

                 T자형으로 길이 양쪽으로 나뉘고 주변 상가는 온통 중국의 거리에 온 듯이 느껴진다.

 

                 붉은 색 간판과 紅燈이 내걸리고,

                 음식점이나 진열된 상품들은 거의가 중국 일색이다.


                 이렇게 화려하게 단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지만

                 이들의 과거를 보면 누구보다도 눈물겨운 세월을 보내면서

                 이곳에서 화교사회의 명맥을 이어 왔다.


                 다른 나라에 있는 차이나타운과

                 仁川의 차이나타운은 근본적으로 형성구조가 다르다.


                 외국의 경우

                 오랜 세월을 두고, 최초 노동자부터 근대 중국의 불안한 정국을 피해 이주한

                 중산층까지 포함하여 중국거리가 형성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근대화 과정에서

                 가까운 거리의 이점을 살려 상업을 위해 이곳에 안주한 터전이다.

                                                         

 

 

 

 

 

 

 

 

 

 

 

 

 

 

 

 

 

 

 

                  1882년 최초로 40여명의 군역 상인들이 이 땅에 정착한 이후 2년 후에는

                  청나라 조계지(집단 거주지역)가 형성되었다.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청국인들은 당시 청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귀한 물품인 비단, 광목, 농수산품 및 경공업품을 들여다 팔다 보니 엄청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장사가 잘되니 이곳 인천에 상가건물이나 주거할 집을 지을 필요가 생기니,

                 중국식 건축에 필요한 목수, 기와공, 미장공들도 조선에 오게 된다.

 

                 특히, 인천과 뱃길이 트인 산동성에서는 조선의 인천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의화단 사건에 관련된 이들에게는 피란처로 그들의 집결지 같은 곳이었다.


                 이지역을 당시에는 청나라 관청(청국 영사관)이 있는 곳이라 하여 淸館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인들은 이곳을 중국을 비하하는 명칭인 지나정이라고 불렀다.

 

                 외국에 나가 살더라도 조국이 잘 살아야 대우를 받는다.

                 1894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손들고

                 중국 북경에는 서방세력에게 안방을 내주고,

                 타이완, 만주지역도 문서로만 중국령 일뿐 일본이 주인 노릇을 하니,

                 조선에 있는 화교들의 생활도 그리 안정적 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조선에서는 대국인으로 행세하며 거들대던 세월도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의 파괴되고 만다.

                영흥도 앞바다에서 인천을 향한 함포사격을 정면으로 받은 곳이 지금의 차이나타운이다.

 

                사진으로 보면 당시 청관 거리는 2층으로 된 중국식 건물이 즐비하게 보이건만 지금 남아있는 곳이 아주 드물다.

                전쟁 후에도 화교 사회는 한국에서 외면을 당한다.

                화폐개혁으로 장롱 속 돈을 모두 신고해야 했고,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으로 그들이 반세기 이상 가꾸어온 주안, 용현동, 부평 일대의 황금 농장이 헐값에 판매되거나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니 대부분의 화교들은 이 땅을 떠났다.

 

                화교들만이 경영하던 중국 음식업을 한국인들도 경영할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니

                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차이나 타운 사진

 

 

 

화교 이야기

 

한국 화교의 시초는 기록적으로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淸)조정에서 3천여 명의 군대가 오는데

이때 軍役 商人으로 같이 온 40명의 華商이라고 한다.


임오군란이 진압 된 후에 조선과 청나라와는 “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는데.

조약의 내용 중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 지방관원의 인가를 얻으면

내륙에서 상업활동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이전에는 책문(청과 조선의 국경지역)에서만 통상이 이루어 졌으나

조약 체결 이후는 청상들이 내륙지방까지 대거 몰려오게 된다.

 

특히 1885년부터 원세계가 청나라 주 조선대표 (실제는 총영사)로 부임하고 부터는

일본 상인에 경쟁하기 위하여 상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베풀게 되니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선의 상권은 화상들에 의해 주도권을 잡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많은 화교들이 일시 귀국을 했지만, 당시 청국의 불안과 흉년을 피해, 또한 조선에서 구축한 상업활동을 위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니 1898년에는 영사관 업무도 재개 된다.

 

1887년에는 산동 연태지방에 살던 왕씨와 강씨가 채소 종자를 들여와 채소 농사를 시작하니

당시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이 모두 이들에 의해 전파 된다.

 

특히 중국의 상해, 청도, 연태, 석도 등에서 왕래하는 화물선이 기항하는 인천은

일본인 및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니

다른 지역에 비해 화교의 숫자도 많아 그들이 조차한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좁아

경동, 신포동 일대, 용현동, 주안, 부평지역에 모여 살며

상업활동 외에 채소 시장까지도 그들에 의해 성업을 이루게 된다.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조선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상업 활동은 많이 수축되지만,

타고난 그들의 장사 수완과 성실성에 힘입어 화교의 수도 늘어나

1930년대 초 조선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6만여명이나 되었다.

1931년 만보산사건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킨 일본인들의 조작으로

조선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상점이 불타고 테러를 당하니

생명에 위험을 느낀 중국인들이 일시 귀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진상이 밝혀진 후 다시 돌아오지만 오래지 않아 일본이 중국과 전면전으로 이후 화교사회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1945년 한국이 해방되면서 한국내의 화교에 대한 정책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특히. 한국전쟁 후에는 화교들의 본국 왕래까지 제한을 받고,

계속하여 이승만, 박정희 정부를 거치며 화교들의 한국 내에서의 상업 활동과 부동산 소유 등에 제한을 받으니

많은 사람들이 대만이나, 홍콩, 미국 호주등지로 떠나게 된다.

 

중국인들은 13세기부터 이민(해외이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는데

중국과 제일 가까운 한국에 차이나타운이 없다는 것이 남들에게 결코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1998년 IMF사태를 겪으며 정부에서는 화교 자본의 유치를 생각하고

차이나타운을 재개발하여 전 세계 ‘화상회의’까지 유치하지만 그 결과는 미미하였다.

 

다행스러운 일은 계속 이 지역을 정비하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